에바브라와 기도의 봉사

Charles Henry Mackintosh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영감으로 된 기록과 모든 인간의 전기 사이에는 아주 뚜렷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적지만 많다”고 말해도 옳겠으나 후자의 상당수는 “많지만 별로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 중 한 사람의 역사, 365년이라는 기간에 걸친 이 역사가
단 두 구절로 요약 되어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5:24). 이렇게 간결할 수가! 하지만 얼마나 충만하고, 얼마나 많은 것을 담고 있는지! 이런 삶의 기록을 사람이 책으로 쓴다면 몇 권이나 채웠을까! 하지만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었을까! 어느 누구를 일컫더라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하면 더 이상의 말이 없어도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구 일주를 할 수도 있고 온 사방에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벗은 자를 입히고 병든 자를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인쇄하여 출판할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인간이 할 수 있는 아니면 행한 모든 것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더니”라는 이 짧은 구절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삶을 그렇게 요약할 수 있다면 그이에게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앞에서 나열한 거의 모든 것을 하지만 한 시간도 전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의 의미조차도 모를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엄숙해지고 실제적이 됩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숨겨진 삶을 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 삶이 없다면 가장 남들 눈에 띄는 봉사도 결국엔 한낱 반짝하고 마는 것이요 연기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에바브라라는 이름이 어떻게 소개되는지 살펴보면 우리는 왠지 유난히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를 넌지시 일컫는 말씀은 짧지만 그윽합니다. 그는 오늘날 당장 너무나도 필요한 인물의 표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수고는, 영감을 받은 기자가 기록한 대로만 보면, 그다지 요란하거나 시선을 끌만했던 것 같지 않습니다. 사람의 눈에 들거나 사람의 칭찬을 얻어내려는 계산으로 한 수고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 그의 수고는 너무나 소중한 수고였습니다- 견줄 대 없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수고였습니다! 그 수고는 골방의 수고요, 문을 잠그고 한 수고요, 성소에서의 수고요, 빠지면 다른 모든 것은 열매 없고 쓸모 없게 되는 그런 수고였습니다. 거룩한 책에 그의 삶을 기록한 기자는 우리에게 그를 능력 있는 설교자나 부지런한 작가나 위대한 여행자로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런 인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도 나름대로 참으로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에바브라가 그런 인물 중 하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이 유난히도 흥미로운 인물을 우리 앞에 어떻게 제시하시는지를 살펴보면 우리를 도덕적, 영적 존재의 깊숙이까지 흔들어 놓으시려는 계산하에서 그렇게 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를 기도의 사람- 간절하고 뜨겁고 애쓰는 기도, 자기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남들을 위한 기도를 하는 인물로 제시하셨습니다. 이 영감으로 된 증거를 들어보십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골 4:12-13). 에바브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그런 인물이 수백 명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설교자들이 있어
감사하고 글 쓰는 이들과 그리스도를 위해 여행하는 이들을 인해 감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의 사람들, 골방의 사람들, 에바브라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서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어 기쁩니다. 그들이 고귀한 뜻을 이루고자 준비된 작가의 펜을 빌어 글을 남길 수 있어 기쁩니다. 그들이 참 전도자의 마음으로 “저 먼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볼 때 기쁠 따름입니다. 그들이 참 목자의 마음으로 가서 온 사방의 형제들을 거듭 거듭 방문하는 것을 볼 때 기쁩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렇게 귀한 봉사들의 가치를 깍아 내리거나 함부로 비방하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예, 우리는 이런 일들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귀하게 여깁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 뒤에 우리는 기도의 영, 뜨겁고 애쓰는 인내하는 기도의 영을 원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 것도 번성하지 못합니다. 기도 없는 사람은 기운 없는 사람입니다. 기도 없는 설교자는 무익한 설교자 입니다. 기도 없는 작가는 메마른 글들을 내보내게 마련입니다. 기도 없는 전도자는 별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기도 없는 목자는 양떼에게 먹일 것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사람들, 에바브라 같은 사람들, 골방 벽이 그들의 애쓰는 수고를 목격하는 그런 사람들을 원합니다. 의심할 바 없이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지금 당장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골방의 수고에는 엄청난 이점이 있습니다. 매우 특이한 이점이요 이 수고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점이요 그 수고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게도 이점입니다. 이는 조용하며 남의 눈을 끌지 않는 수고입니다. 은퇴해서도 계속 하는 수고요, 하나님의 존전에서, 거룩하고 영혼을 잠잠하게 하는 고독가운데, 육체의 시력이 다한 상태에서도 행하는 수고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이 에바브라의 사랑에서 나온 성심 어린 수고가 어떠했는지, 만일 성령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얼마큼이나 알 수 있었겠습니까! 개중엔 자신들을 대표하여 간 에바브라가 열심을 내어 돌보는 면이 부족하다고 여긴 이들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듯이 그 당시에도 심방이나 편지를 가지고 어떤 사람의 돌아봄이나 긍휼이 어떠한 지를 재는 사람들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는 잘못된 기준이 될 것입니다. 얼마나 남을 돌아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지를 알자면 무릎 꿇고 있는 에바브라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여행을 좋아해서 형제들을 방문하려고 런던에서 에딘버러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글 몇 자 적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받는 모든 편지에 꼬박 꼬박 답장을 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영혼에 대한 사랑,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나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여 에바브라가 했던 것처럼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애써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골방의 소중한 수고는 특별한 은사나 특이한 재능이나 비범한 지적인 능력을 타고 나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는 능력이 있거나 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간혹 기도의 은사라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는 유쾌한 표현이 못됩니다. 듣기가 거북한 말입니다. 흔히 이는 어떤 알려진 사실들을 단순히 달변으로 내뱉는 것이요 기억에 담고 있었는데 입술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은 해도 별 가치가 없습니다. 에바브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도 간절히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진정한 기도의 영을 원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현재 필요를 알아내어 은혜의 보좌 앞에서 인내하며 간절한, 믿음의 중보 기도로 그 필요를 받들어 아뢰는 영을 원합니다. 이 영은 언제나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일할 수 있습니다. 골방에서 수고하는 자에게는 아침이나 정오나 저녁이나 자정이나 다 좋습니다. 마음은 기도와 간구로 언제나 보좌 앞에 뛰어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귀는 언제나 열려 있으십니다. 그분께서 거하시는 방은 언제나 출입이 가능합니다. 언제나 무엇이든 가지고 오라, 아버지께서는 늘 들으실 준비가 되어 계시니, 응답하실 준비가 되어 계시니. 아버지께서는 끈덕진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하시며, 사랑하십니다. 친히 말씀하시기를, “구하라…찾으라..두드리라” ; “사람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어디에나 적용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 모두를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연약한 하나님의 자녀라도 기도할 수 있고 깨어있을 수 있고, 응답 받을 수 있고 거기에 대해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을 위해 끊임 없이 기도하는 습관만큼 확실하게 그 사람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은 또 없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관심이 있으니 그는 기도했고 그의 기도는 그가 관심을 가지게 했습니다. 우리가 누구한테라도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그를 위해 더 기도합니다. 그리고 더 기도할수록 우리는 더 관심을 가집니다.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더 많아질 때마다, 우리는 그들이 자라고 잘 되는 것을 볼 때 어김 없이 기뻐합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아뢰게 될 때, 그들의 구원을 참으로 간절히 구하게 되며 그들이 구원받게 되면 꾸밈 없는 감사를 드리며 환호합니다. 이런 생각만 해도 우리 마음은 에바브라를 본 받고 싶은 마음이 솟아 나니, 바로 이 사람에게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그의 간절한 기도와 관련해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존귀한 호칭을 내려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바브라의 영을 얻고자 하는 바램이 생기게 만드는 가장 고상한 이유는 그런 영을 가질 때 그리스도의 영과 직접적으로 긴밀히 연합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고상한 동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대표해 나서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목표로 기도 하도록 이끄심을 받는 사람들은 위대하신 중보자와 차원 높은 교제를 누리는 특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땅의 초라하고 미약한 피조물들이 영광의 주의 생각과 관심을 끌 수 있는 일에 대해 기도하도록 허락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에바브라가 골로새의 형제들을 위해 애쓰고 있을 때 그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마음이 얼마나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는지요! 에바브라의 본을 곰곰히 생각해봅시다. 그를 본받읍시다. 골로새 같은 어떤 모임, 다른 곳에 우리의 눈을 고정시키고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뜨겁게 기도로 수고하십시다. 지금은 매우 엄숙한 순간입니다. 아, 에바브라와 같은 인물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무릎을 꿇고 수고하려는 사람들, 또 그래야 된다면 복음의 고귀한 사슬을 기꺼이 매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에바브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는 기도의 사람이요 (골 4:12), 이방인들의 헌신적인 사도와 함께 매인 바 된 자였습니다 (몬 23). 주께서 우리 가운데 간절한 기도와 중보의 영을 불러 일으키시기를. 우리 중 에바브라와 같은 영을 가지게 될 이들을 많이 일으키시기를.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지금 필요한 사람들입니다.